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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탐방
광복 후 한동안 우리 나라는 나라 이름마저 각양각이하게 부를 정도로 다양한 성향의 정치세력들이 난립하여 혼란을 거듭하였습니다. 미군이 가장 일찍 진주하였다는 인천지역사회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미군정을 거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경제를 지향한다는 국민적 합의가 이루어지면서 인천지역사회는 빠르게 안정되어 갔습니다. 미군정 때 잠시 제물포시(1945년 10월 10일27일)로 바뀌었던 인천부도 1949년 지방 자치법에 따라 경기도 인천시로 정립되었고(1949년 8월 15일), 시의회도 구성되었으며(1952년) 시장 또한 간선으로 선출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에 의하여 일본의 잔재와 미군정의 과도기적 조치 조치들이 하나하나 청산되고 일신되어 갔고, 경제 안정과 발전을 위한 여러 가지 시책도 속속 마련되어 갔습니다. 강화군, 김포군 또한 다르지 않았으니, 인천지역사회가 역사상 처음으로 경험하는 민주적 자치행정이었습니다. 주민에 의한, 주민을 위한 행정과 산업이 바야흐로 시작된 것입니다. 그러나 1950년 6월 25일에 발발한 북한군의 남침(한국전쟁)은 인천지역사회에 다시 한번 시련을 주었습니다. 인명의 피해나 주민간의 갈등에서도 그러하였지만, 일본이 남겨 놓고 간 공장과 시설로나마 가까스로 일구어 가던 경제가 거의 무너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휴전(1953년 7월 23일) 후 20여 만 명의 이북 피난민까지 수용했던 인천지역사회는 각고의 노력을 다시 해야 하였습니다. 인천항을 수,출입 창구로 하고 그 배후 공단을 주요 가공 공단으로 하였던 정부 정책과, 인천항을 한국의 관문으로 삼았던 미국의 특별한 배려는 이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휴전 이듬해 말에는 원인천에서만도 267개 공장을 갖게 되는 복구를 이루었으나, 자재난·전력난·자금난에다가 기술력의 부족까지 겹쳐 더 이상의 성장에는 한계를 보이고 있었습니다.
인천지역사회의 본격적인 성장은 1960, 70년대에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거듭 추진되면서 이루어졌다. 원인천의 임해공단들과 부평공단(경인공단)에 대한 집중적인 투자가 수출 위주로 전개되면서 이를 위한 각종 기간시설의 확충과 편의시설의 확대가 우선적으로 마련되었습니다. 원인천사회의 이러한 성장은 주변 지역에도 영향을 주어 각종 산업을 발달하게 하고 아울러 원인천사회를 중심으로 인구 증가를 가속화시켰습니다. 인천시(원인천)가 구제를 실시하던(1968) 당시, 인천시는 서울, 부산, 대구에 이어 4대 도시로 성장하여 있었고, 지속된 경제발전은 인천시의 산업과 사회를 더욱 성장시켜 인구 100만명을 돌파하여 인천직할시로 승격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아가서는 세계화, 정보화의 추세와 중국의 개방화 정책으로 인천지역의 지정학적 비중이 더욱 높아지자 1961년에 폐지된 지방자치제의 부활(1991)과 연계하여 인천광역시로 확장,승격되기에(1995년 3월 1일) 이르렀습니다. 인천지역사회가 지난날 경험하고 축적한 다양한 토양을 바탕으로 피어난 한송이 장미꽃 세월을 거듭하며 획득한 월계관입니다.
인천광역시는 지금도 개발과 성장을 지속하고 있다. 인천항과 인천국제공항(2001년 3월 개항)의 확장, 공유수면의 매립과 각종 산업·물류단지의 조성, 관광·레저단지와 새로운 주거단지의 건설, 인천지하철(1999년 12월 개통)과 고속화도로의 확대, 교육·문화시설의 증대 등등 이루 헤아리기 어려운 정도입니다.
인천광역시는 지금 동북아시아의 중심도시로 세계를 향해 웅비하고 있습니다. 서울의 관문으로서 항만, 상업도시를 이루어 온 원인천에다가 농,공업도시 부평을 아우르고, 이어 농·수산과 문화·관광의 보고강화와 옹진 등을 합하면서 동북아시아의 허브공항을 더하여, 명실상부한 한반도의 거대한 관문이자 국제적 물류중심지, 산업·정보단지, 관광·휴양단지로 비약적인 성장을 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난 날의 인천과는 완연히 다른 새로운 차원의 국제도시로 변화하고 있습니다.
인천의 최초 명칭은 미추호 이었습다. 이 지역이 하나의 행정구역으로 등장하는 것은 고구려 장수왕 때(475)로 매소홀현
이었습니다. 이후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경덕왕 때 한자식으로 바뀌어 소성현이 되었습니다. 고려 숙종(1095~1105) 때 숙종 어머니의 내향이었던 관계로 경원군으로 개칭, 승격되었습니다. 그 뒤 인종(1122~1146)때에 순덕왕후 이씨의 내향이라 하여 인주로 승격되었는데 이자겸의 난으로 인주 이씨가 몰락하다시피 하였으나 공양왕 2년(1390)에 이르러 다시 경원부로 환원되었습니다.
그것은 칠대어향이라 하여 문종에서 인종에 이르는 7대 동안 고려왕실과 관련이 있는 지역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조선왕조가 개창되면서 경원부는 다시 인주로 환원되었습니다. 그러나 태종 13년 주 자를 가진 도호부 이하의 군,현 명을 산, 천 두 글자 중 하나로 개정토록 하여 현재의 인천으로 탄생하게 되었고, 그날 (1413년 10월 15일)을 기려 인천시민의 날 이 제정되었습니다.
인천 탐방 관광지
월미도
1920년대 후반부터 1930년대까지가 월미도 유원지의 전성기였습니다. 당시 조선인과 일본인 남녀노소를 가릴 것 없이 월미도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합니다. 1989년 7월 문화의 거리가 조성된 이래 문화예술의 장, 만남과 교환의 장 그리고 공연놀이 마당 등으로도 알려지기 시작한 월미도는 인천하면 떠올릴 만큼 유명한 곳으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휴일엔 각지에서 수십만 명의 인파가 몰리는 이곳에는 카페, 회센터 등 조화를 이루며 늘어서 있어 시원한 바다를 바라보며 구미에 맞는 음식을 골라 즐길 수도 있습니다. 인천 앞바다 1km 거리에 떠있는 둘레 4km의 월미도는 섬 아닌 섬으로 변모하고 인천시민의 또한 그 주변의 시민의 휴식 공간으로 자리를 굳히고 있습니다.
월미테마파크
인천시 중구 북성동 월미문화로 81에 위치한 월미테마파크는 월미문화의 거리에 있는 마이랜드에서 추억의 놀이기구를 타거나, ‘태양의 후예’ 촬영했던 탄천사격연습장도 방문해보고 월미달빛음악 분수에서 아름다운 조명과 음악이 함께 하는 분수도 있습니다.
월미공원 전망대
인천시 중구 북성동1가 산2-3에 위치한 월미공원 전망대는 월미 문화의 거리와 가까운 월미공원 정상에 위치한 월미달및마루 카페 전망대에오르면 인천항 야경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 오후 7시 이후부터 커플들을 위한 프로포즈 이벤트 대관도 진행합니다.
영종씨사이드 레일바이크
인천시 중구 구읍로 75에 위치한 영종씨사이드 레이바이크는 4인승 구조로 씨사이드파크의 해안을 따라 왕복 5.6km의 선로를 타고 달립니다. 눈앞의 탁트인 해안은 레일바이크를 타고 달리는 동안 월미도에서부터 인천대교까지의 풍경을 한눈에 담아 즐거운 경험을 선사합니다.
옥토끼우주센터
인천시 강화군 불은면 강화동로 403에 위치한 옥토끼우주센터는 국내 최초의 항공우주과학 테마파크로써 항공우주 관련 자료를 수집, 보존하여 어린이 및 일반 대중들의 항공우주과학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한 전시 및 교육을 실시하고 있습니다.